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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이야기

나진성의 험난했던 축구여행기- 그래도 축구가좋다.

by 나진성 감독의 축구이야기 2020.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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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나는 선천적으로 늦게 성장하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경기장에 들락날락하는 선수였다
그런 결과 또래 선수들 상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시기에 나는 지방의 덜 알려진 학교로 진학하였다
들어가자마자 고등학교에선 기회를 많이 받았지만 고등학교 가서도 항상 피지컬 문제로 경기장에서 한계에 많이 부딪혔다, 고3 동계훈련에선 급성빈혈로 동계훈련을 통으로 날려먹었다
그러면서 고2 때부터 진학하기로 된 대학교에서 날 외면했고 결국 내가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방의 한 대학교에 임시로 있게 되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 대학 U 리그 시합 중 몇 차례 좋은 경기력으로 관계자 눈에 띄어서 1학년 때 좋은 기회로 전남 드래곤즈 연습생으로 훈련할 기회가 있었고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합류했다 당시 내 나이 연령대 대표 팀 선수들도 많았고 순간순간이 너무 신기했다 좋은 선수들과 훈련하고 축구하니까 하루하루 나의 성장이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계약 얘기가 나오면서 연말에 있을 드래프트에서 순위 지명 이야기까지 나오게 됐다 하지만 당시 감독 교체와 모든 부분이 틀어지며 결과적으로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하고 다시 무적 신세가 되었다.


축구란 세계가 취업문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고 한때는 포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다행히 오래가지 않았고
그때 고교 은사님의 권유로 또 다른 대학교에 편입하게 되며 다시금 축구에 집중하였다

마지막이라며 대학교 4학년 나이에 딱 일 년만 하고 프로에 못 가면 축구화를 벗겼다는 각오로 매일 아침마다 산을 뛰며 마음을 잡았다 그리고 매 경기 그리고 하루하루를 마지막 각오로 훈련하고 후회 없이 지냈다 그러면서 하반기 즈음 중국으로 좋은 테스트 기회가 생겼고 있는 동안 되돌아보면 그 시기는 축구의 눈을 뜰 수 있는 시기였다


어떻게 축구를 해야 하는지가 조금씩 보였다 있는 동안 또 다른 에이전트와 접촉할 수 있었고 당시는 중국 문턱이 낮았기에 시즌 종료 시점 합류할 수 있는 답변을 듣게 된다
그리고 정말 많이 성장해서 돌아오자마자 그 시점 유명 브랜드 나이키에서 지원하는 축구 오디션 프로그램 "나이키 더 찬스"라는 곳에 지원하면서 내 인생에 전환점을 맡게 된다.

정말 테스트에 대한 준비와 분석도 많이 하고 정말 간절하게 준비했고 정말 치열하게 경쟁한 결과 결국엔 안정환이 선택하는 한국 대표 최종 3인에 선택되며 영국 나이키 아카데미 선발전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곳에는 정말 다양한 국적의 이기적인 선수, 정말 축구를 잘하는 선수, 건방진 선수, 가난한 나라의 선수, 절실한 선수,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다 프로선수가 된다는 것 딱 그 한 가지였다.


결국 나이키 아카데미에서 뽑는 최후에 8인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너무 어린 선수들이 즐비했고 축구 잘하는 선수들이 너무 많았기에 나에게는 기회 자체가 많이 오지 않았다.
마지막 만찬장 자리에서 영국 지미 길리건 총감독의 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Dream ends when you give up" 꿈은 포기할 때 사라지는 것이라고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 프로가 되기 위해 끝까지 하다 보면 결국에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돌아오는 한국 비행기에서 곰곰이 생각하며 다이어리를 적었다 축구를 했으면 어찌 됐든 축구 잘하는 대륙에서 축구해봐야 할 거 아니냐며 정확히 3년 안에 유럽에서 축구할 거라는 다짐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그 시점 성남FC 테스트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중국으로 출국이 10일 앞으로 다가왔을 시점이었다.
중국으로 가기 전 몸도 만들 겸 가보자 해서 흔쾌히 승낙하고 갔었다. 당시 대학교 은사님의 권유로 가게 되었는데 가자마자 50명가량의 선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3쿼터로 진행된 경기에서 나는 3쿼터에 들어갔다 그 정도로 거기서는 존재감이 없던 선수였다 하지만 3쿼터 시작하자마자 우연치 않게 첫 터치에 중거리 슈팅이 들어가서 그 다음날 테스트에는 1쿼터에 뛰는 선수가 됐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욕심이 없었지만 두 번째 날에도 좋은 경기력이 나와서 20명만 살아남는 3번째 날까지 가게 되었다 3번째 날조 차도 이상하게 잘해버렸다. 끝나고 당시 감독님이 나를 따로 불러서 "너를 뽑으려고 한다 안 다치게 잘 관리하고 웨이트트레이닝 많이 해"라고 말씀하셨다

박종환 감독님과.


사실 어리둥절했다 그때 날짜가 중국 출국 딱 이틀 남짓 남아있었다 비행기 표 짐가방 준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었기에 기분은 좋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성남 측에서도 일단 테스트 선수 10명을 다 돌려보내면서 다시 따로 연락만 주겠다고 말하고 다 귀가 시켰다.
그러고 나는 다음날이 돼도 연락이 없었고 다음 자고 일어나서 11시 비행기 때문에 공항으로 출발하려는 찰나에 아침 일찍 성남에서 연락이 왔다.
모례 2시까지 합숙 준비해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 급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결국엔 부모님의 만류로 한국에 남았다 그러고 성남에서의 프로생활이 시작됐다.



동계훈련부터 1군에서 계속 경기 뛰며 내 자리가 과연 이게 맞는 건가?라고 느낄 정도로 너무 좋은 선수들과 계속해서 경기에 나갔다 그러면서 마지막 해외 동계훈련에 가서도 신인으로썬 많은 경기를 소화했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즌초 도중 훈련에서 잘못된 슈팅 동작에서 크게 발바닥 부상을 당했다.
그사이 나를 뽑았던 감독님이 사퇴하고 1년 만에 총 네 분의 감독님을 뵙게 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신인으로썬 너무나 어려운 입지였고 시즌이 끝날 무렵 재계약 소식도 미비하게 되었다
그런 어수선한 시간이 지날수록 1년 전에 내가 꾸었던 그 꿈 유럽에서 축구하겠다는 꿈은 더욱더 커졌다.


꿈을 키워가며 유럽 쪽 에이전트와 접촉하기 위해 조금씩 공부했던 영어로 유럽 여러 에이전트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촉박해져 갈수록 그사이 경남FC 와 내셔널리그 한 팀에 테스트 다녀왔지만 내가 정말 절실하지 않으니 들어가서도 크게 내 스스로 의지가 보이지 않았던 거 같다, 그 당시 나는 여전히 유럽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 한 통의 현지 에이전트의 메시지를 받았다.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오라는 메시지였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나는 무조건 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무작정 떠났다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거기서 살겠다는 각오로 갔다 당시 가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다

공항에 도착했고 숙소에 짐을 풀고 와이파이를 잡으니 메시지가 한 통 와있었다 주소를 불러주며 이 주소로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찾아가니 동네의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어떤 인상 무서운 할아버지가 오더니 내겐 어려운 영어로 말을 거는 것이었다 하나도 못 알아듣다가 딱 한 문장이 귀에 들어왔다, "you really want to play europe?" 나는 듣자마자 꼭 그러고 싶다고 말을 하였고
곧바로 한국에 있는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 좋아 그럼 내일 2부 리그 팀에서 널 테스트해볼 거야"라고 말을 남겼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의 절친이 현재 유벤투스에서 뛰는 만주키치 대리인이었다.


그러고 다음날에 나는 먼저 2부 리그 팀에서 3일간 테스트를 보았다 문득 든 생각은 2부 리그에서 먼저 시작을 하면 내 최종 목표인 분데스리가를 가기엔 너무 늦겠다 생각했다 (그때 당시는 꿈이 워낙 컸다 말도 안 되는 꿈이지만..) 테스트 날이 지났고 현지 에이전트와 2부 리그 팀의 감독이 날 인정해주며 여기서 시작할 레벨은 아니라고 하였고 1부 리그에서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곤 에이전트가 다시 나를 데리고 갔고 바로 1부 리그에 NK ISTRA1961이라는 팀에 합류하였다.


3일간 훈련을 했고 크로아티아 언더 19 대표 팀과 마지막 경기로 2년 반이라는 계약서 사인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인하자마자 구단주가 다른 나라 사람으로 바뀐다는 소문이 있었고 설상가상 임금체불이 상당히 심해졌다.

3개월 이상 월급이 밀리다 보니 정신으로 너무나도 힘들었다 에이전트가 임시방편으로 돈을 빌려주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계약서에 임금체불이 될 경우 계약서를 파기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고 그 조항으로 다른 팀과 계속 접촉을 했다

급여 문제로 정말 많이 지쳐 갈 무렵 여름 이적시장 막바지가 되었다 시즌이 시작하기 전 태국 1부 리그 팀에서 오퍼가 들어왔고 비행기 티켓과 모든 비용을 팀에서 지불해주고 나를 데려가려고 했다 많은 고민 끝에 임대계약으로 간다는 조건하에 비행기에 올랐고 태국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바뀌었다 구단주는 한국의 다른 선수를 원하고 감독은 나를 원하는 상태였다 그 상황이 나아지지 못하자 감독이 미안하다고 말을 남긴 채 그러곤 다른 팀에 갈 수 있는 비행기 티켓을 주었고 나는 어리둥절한 채 다른 팀과 계약하게 되었다

이적시장 마감 3일 남기고 급하게 계약하고 일주일 만에 경기에 나섰다 컨디션이 나빠서 처음에 고생도 많이 했다 사 계절 날씨에서 살다가 사 계절 내내 여름나라에서 살다 보니 몸이 적응을 못해서 감기를 달고 살았다 처음에는 정말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지만 회복하고 점차 점차 좋아져서
나름 좋은 컨디션으로 16경기 3골 3도움이라는 나름대로 준수한 시즌을 보낸 채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시즌 종료와 동시에 동남아 두 팀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생각보다 많은 연봉과 좋은 조건이었지만 나의 꿈과 시선은 오로지 유럽에서의 재도전이었다


그래서 전 소속 팀으로 임대복귀를 하였다 하지만 구단주 감독 코치 다 바뀌었고 내가 아는 선수는 5명에 불과했다, 구단은 계약 해지를 요구했고 현지어가 능통치 못했기에 큰 어필조차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급히 유럽 현지 에이전트가 여러 팀을 체크해주었고 급하게 터키 안탈리아로 떠났다 거기서 내가 합류한 팀은 유럽 카자흐스탄에 있는 카이 라트 FC라는 팀이었다 합류했을 당시 아르샤빈이 함께 훈련했었다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 국가대표 선수들도 많았고 정말 체계가 잘 잡힌 팀이었다

감독 코치도 좋은 평가를 해주었지만 외국인 제한 문제로 결국에는 계약하지 못했고 급하게 헝가리로 비행기를 타고 넘어가서 슬로바키아 팀과 계약을 준비했다 하지만 메디컬 테스트 도중 몸에 조그마한 문제가 있는데 그게 확실치 못해서 계약을 못 하겠다고 말을 전해 들었다


그 시기 즈음 겨울 이적시장이 닫혔고 나는 무적 선수가 되었다
그러곤 미루었던 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K3 팀에서 운동을 하고 2년이 채 다 돼가고 전역이 다가올 무렵 또다시 한번 내 인생 스토리를 바꿀만한 제안을 받았고 나는 그 제안을 깊게 생각해보고 결정하게 되었다.

세상 축구선수들 중 사연 없는 선수는 한 명도 없다 나 역시도 그런 선수였기에 이렇게 다시 정리를 해보니 참 많은 일들을 겪었던 거 같다.
정말 당시는 힘들고 외롭고 지쳤지만 그때 당시 내가 타국에서 버티고 싸웠던 게 지금의 나의 큰 힘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많은 경험으로 작용할 거라고 굳게 믿는다
나는 크게 성공한 커리어의 선수도 아니고 유명한 선수도 아니다 하지만 축구할 때만큼은 정말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고 생각한다

은퇴라고 부르기엔 부끄럽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
내가 하고 싶은 축구 관련된 일을 하면서 정말 재밌게 잘 살고 싶다
정말 힘들고 지칠 때도 많을 테지만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는 축구선수들 파이팅!!!
#수고했다 #나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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